2026-07-10
설계는 서구권, 제조는 아시아...배터리도 '파운드리 시대'
배터리 산업이 반도체 분업을 따라가고 있다. 기술을 쥔 서구권이 설계를, 제조 인프라를 갖춘 아시아가 양산을 맡는 구조로 빠르게 재편되는 양상이다. 반도체가 설계(팹리스)와 제조(파운드리)로 갈라지며 위탁생산 전문 기업을 키워냈듯, 배터리에서도 생산만 전담하는 '파운드리(위탁생산)' 모델이 새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배터리 산업에 서구권 기업은 차세대 화학 조성 설계와 지식재산(IP) 확보에 집중하고, 제조 인프라와 숙련 공정을 갖춘 아시아가 위탁 생산을 담당하는 분업이 자리 잡는 추세다.
역할 분화는 양측의 필요가 맞물린 결과다. 설계에 특화한 기업은 공장을 짓지 않고도 시장에 진입할 수 있고, 제조사는 확보한 라인을 여러 고객사 물량으로 채워 가동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 반도체에서 팹리스가 설계로 승부하고 파운드리가 규모의 경제로 원가를 낮췄듯, 배터리에서도 설계와 제조가 각자 잘하는 영역에 집중하는 구조가 굳어지는 모습이다.
이 같은 재편은 서구권 제조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시작됐다. 유럽연합(EU) 산하 공동연구센터(JRC)의 유럽 배터리 기술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EU는 원자재 공급 한계와 높은 에너지·인건비 등으로 배터리 연구·제조 공급망 전반에서 아시아에 견줄 독자적 제조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보고서는 미국 내 배터리 셀 현지화가 진행 중이지만 중국·아시아 생태계와의 완전한 디커플링(분리)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분업을 앞당긴 직접적 계기는 자체 공장 건설의 한계다. 대규모 기가팩토리를 직접 짓고 운영하는 방식은 막대한 자본과 인허가 부담, 숙련 인력 확보의 어려움으로 수율 확보에 번번이 발목이 잡혔다. 일례로 스웨덴 노스볼트의 파산은 이런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이후 업계 전반에는 '고정비를 짊어지기보다 핵심 소재·설계 기술만 보유하고 제조는 외주화한다'는 자산경량화(Asset-Light) 전략이 확산됐다. 이미 검증된 아시아의 양산 인프라를 빌려 쓰면 공장 건설 기간을 줄이고 생산 비용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미국의 규제 환경이 작용한 점도 있다. 국방수권법(NDAA)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라 중국 등 해외우려기관(FEOC) 가치사슬에 묶인 배터리 배제가 강하게 요구되면서, 미국 기업들은 중국 공장을 직접 쓰기보다 한국·동남아 등 비(非)중국계 아시아 제조사의 유휴 설비를 파운드리 형태로 활용하는 우회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아울러 배터리 소재와 기술이 다양해지는 점도 분업을 가속한다. 기존 삼원계(NMC) 중심 구조에서 리튬인산철(LFP), 리튬망간리치(LMR), 소듐이온 등 여러 화학계가 등장하면서 한 기업이 모든 제품을 직접 생산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주력 제품은 내재화하되 새로운 소재나 비주력 기술은 외주 생산을 활용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개발 속도를 높이려는 대형 배터리 기업조차 개발 단계에서 파운드리를 활용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로봇용 배터리나 소듐, LMR 등 소재 분야에서 위탁 생산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21년 스웨덴 북부 준공 중이었던 노스볼트 배터리 공장
◆"수익성·수율 안정화가 시장 형성 좌우"
게다가 전기차(EV)와 에너지저장장치(ESS)를 넘어 로봇, 광산, 농기계, 건설장비까지 전동화가 확산되며 다품종 소량 수요가 커지고 있다. 소량·맞춤형 물량은 대형 제조사가 직접 라인을 돌리기에 채산성이 떨어지는 만큼, 전문 위탁 업체에 맡기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이다. 여기에 전기차 캐즘(수요 둔화)이 장기화하며 늘어난 유휴 설비도 위탁 생산 수요와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대목이다.
이런 흐름은 국내 기업과 유럽 간 협력으로도 확인된다. 국내 전극 파운드리 기업 JR에너지솔루션은 지난 '인터배터리 2026'에서 노르웨이 배터리 기업 모로우 배터리스와 유럽 공급망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국내 기업의 전극 파운드리 역량과 모로우의 제조 인프라, LFP·리튬니켈망간산화물(LNMO) 셀 기술을 결합해 노르웨이 공장을 유럽 제조 허브로 삼는 방식이다. 수율·가동률 개선이 과제였던 유럽 제조사와 위탁 생산 경험을 갖춘 국내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JR에너지솔루션은 세미나에서 배터리 파운드리 시장이 약 30조원 이상 규모로 형성될 것으로 자체 추정했다.
파운드리화의 확산은 위탁 물량의 실제 확대 속도에 달렸다. 다품종 소량 수요가 예고대로 커지고 대형 배터리 기업의 개발 단계 외주 활용이 상시화하면, 전극·셀 조립 등 후방 공정을 맡는 파운드리 기업의 사업 기회도 넓어질 전망이다. 업계관계자는 "위탁 생산의 수익성과 수율 안정화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